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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장 ‘이봉주’ 편 (3) - 방짜유기촌 부활의 꿈
작성일 : 2022-12-06 조회수 : 1403
이봉주 육성 // “1미터 61센티미터짜리 징. 그건 우리 인간 사회에서 방짜 기법으로 보면 가장 큰 거. 가장 무겁고 가장 큰 거 그거 만드는 것이 소중한 거죠. 정말 소중한 거죠.”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유기장, ‘이 봉 주’.
제3화, 방짜 유기촌 부활의 꿈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구술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EBS가 오디오 자서전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평북양대공장을 세우다>
#1. 1957년, 서울, 탁 방주의 유기공장


노년 봉주 // 저는 1929년생 방짜 원대장, 이봉주입네다.
파란만장한 이십대 중반까지는 원래 이름 ‘이봉빈’으로 불렸지요.
그러나 6.25 피난 때 증명서를 잘못 신청하면서
형의 이름 ‘이봉주’로 지금까지 살았습네다.
국가무형문화재 유기장 ‘이봉주’는 이제 진짜 이름이 되었지요.
오늘은 먼저 제 스승이자 은인인 탁 방주와의
남은 이야기부터 들려드립네다. 1950년대 후반의 일이지요.


(유기공장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 놋덩어리 메질하는 소리, 놋그릇 소리 등)

30대 봉주 // 탁 방주님, 저희 팀원들이 인건비를 올려달라고 했더니
다 해고한다고 하셨다면서요?
탁 방주 // 아휴.. 저 밑에 옛촌에서 유기 만드는 사람들을 데려오면
인건비 절반이면 된다야.
30대 봉주 // 전쟁 끝나고 놋그릇도 잘 팔리는데 좀 쓰시지요.
사실 제 입장이 난처합네다.
탁 방주 // 자네는 새로 안사람도 맞고 아이도 낳았잖나.
요구대로 다 해줄 테니 절대 나갈 궁리 하지 마세!
내래 원대장 자네만 믿네.


이봉주 육성 // “탁 방주가 은인이지만은 나 원대장 할 적엔 나를 이렇게 도와주고 이러던 친구들 아니요, 전부 다. 근데 하루아침에 한 집도 아니고 여러 가정이 실업자 돼서 거지꼴이 될 것을 생각하면 잠이 안 와. 잠이 안 와.. 어떡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면 좋우. 근데 탁대장은 한 사람 아니야? 한 사람이라도 여러 사람에게 신세진 것 보다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나를 도와주고 원대장 만든 사람이 탁 방주니까 이건 내가 배신할 수 없는 사람은 확실하잖아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잠을 며칠 못 자다가, 그 당시에 마침 제도가 군대에서 제대해 나온 사람들은 수색에 훈련소를 하나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먹고 자고 집에 못 나오고 훈련받는 케이스가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


#2. 1957년, 서울 구로동, 평북양대공장 근처 선술집

(단장의 미아리 고개 / 이해연)
30대 봉주 // 다들 안녕하셨습네까?
박정선 // 자자, 이봉주 원대장이 훈련소서 나온 기념으로 한 잔 합세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
이제화 // 좋습네다. 원대장 나오기 전에 우리가 공장도 마련했다.
이름도 있어! ‘평북양대공장’ 어때? 근사하제이?
30대 봉주 // 내가 자본도 없고 그럴만한 실력도 없는데
다들 이케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네다!
박정선 // 자, 수락의 의미로 원대장이 한마디 하시오.
30대 봉주 // 그럴까요.
‘평북양대공장’의 무궁한 발전을
다같이 // 위하여!
(술잔 부딪히는 소리)


노년 봉주 // 우리 양대공장은 한동안 잘 됐습네다.
1960년엔 구로동에서 염창동으로 더 크게 옮겼지요.
그런데 탁 방주와 거래했던 사람들이
전부 이봉주한테 오는 겁네다.
잘 되니 좋았지만 가슴 한 켠 탁 방주에게 또 죄송했더랬죠.
훗날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네다.

이봉주 육성 // “그런 상황이 내게 또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내 결론은 마찬가지 길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 나는 본래 고지식한 사람이 돼서 내 개인 욕심보다는 여러 사람이 거지되는 것을 내가 참지 못하는.. 그래가지고 나와서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탁 방주는 인원을 딱 했고, 나는 거기서 미운털이 됐고, 또 내 부하들이 거기 가서 세 다 얻어 놓고 일할 준비 딱 해놨잖아요.”


<유기의 몰락과 인생의 위기>
#3. 1960년대, 서울 염창동, 이봉주의 집

(집에서 밥 먹는 소리)
아내 // 여보, 이것 좀 먹어봐요.
40대 봉주 // 통 입맛이 없어.
아내 // 요즘 들어 부쩍 핼쑥해졌어요. 많이 힘들죠?
40대 봉주 // 원대장이 첨 되고 내 공장을 차리니 으쓱했는데,
이젠 30명 인건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빚은 늘지,
게다가 산림 애호법을 시작해가지고 안 팔리게 됐어.
아내 // 산에 들어가서 숯을 못 굽게 하지요?
40대 봉주 // 연료는 없는데, 설상가상 옛날에는 없던 플라스틱, 양은,
이런 게 나오니 결혼할 때 대야 살 궁리를 안 해요.
유기는 닦기 무겁다고 스테인레스를 사가지고 간단 말야.
아내 // 요즘 연탄 때는 집에선 놋그릇이 빨개진다고 안 쓴대요.
동네 엄마들이 왜 그러냐는데 뭐라고 해야죠?
40대 봉주 // 무슨 나쁜 가스가 나와서 그러는 건 줄 아는데
놋그릇 때문이 아냐. 오히려 건강에 좋은 건데. (한숨)
예로부터 독을 가려내고 균을 없애는 ‘생명의 그릇’이라고 했지.
근데 잘못들 알고 있으니, 이러다 다~ 망하겠어.

노년 봉주 // 결국 공장 문을 닫고 말았습네다.
나는 막노동을 하고, 피난 중에 새로 만난 아내는
호떡 장사를 하면서 4남매를 키웠습네다.
새벽엔 한강에서 물고기도 잡아왔드랬죠.
하지만 원대장의 길을 포기할 순 없었지요.


40대 봉주 // (다짐) 지금은 놋그릇이 안 팔리니
내 악기를 만들어봐야갔어!
방짜 원대장이 꽹과리와 징을 만들면
얼마나 좋은 소리가 나갔어. 그래, 일단 해보자!


<재기를 위해 지인을 찾아 나서다>
#4. 1970년대, 전국 곳곳

(맑은 꽹과리 농악 소리)
노년 봉주 // 먼저 염창동 집 마당에 공구를 놓고
사람들을 모아 징이나 꽹과리 같은 악기만 만들었습네다.
마침 대학가에서 농악이 유행이던 때라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지요.
고무신 신고 다니던 3년만에 공장을 안양에 크게 지었습네다.


<미국 질리언사를 두드리다>
#5. 1982년, 미국 보스턴 질디언사(심벌즈 회사)

노년 봉주 // 1982년에 미국 보스턴에 있는 심벌즈 전문회사인 질디언사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집게, 망치 등 내려놓는 소리)
질디언 직원 // 어서 오십시오. 이봉주 선생님.
50대 봉주 // 비자 문제로 다른 팀원은 못 오고 저 혼자만 오게 됐습니다.
한국서 가져온 공구들은 여기 꺼내 놓겠습네다.
질디언 직원 // 아, 이런 망치와 집게로 수작업을 하시는군요.
50대 봉주 // 예예. 다 직접 두드리고 늘려야 진짜 방짜지요.
질디언 직원 // 그럼 이 선생님 기법대로 심벌즈를 같이 만들어볼까요?
50대 봉주 // 시작하시지요. 맨들 땐 통역사 없이 그냥 우리끼리 합시다.


이봉주 육성 // “기술자들 세계는 소통이 돼요. 맨 처음에는 통역을 해준다고 와서 있었는데 일주일 하고서는 내보내버렸어. 왜 필요 없냐 하게 되면 이게 새빨갛게 달았으니까 “이것을 내려보내라” 통역에다가 얘기하면 그걸 “다 달았으니까 내려 보내랜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도수가 안 맞아. 시차가 안 맞아. 그러니까 해보니까는 이 사람이 통역할 게 없는 거이 저 사람도 쇠가 열이 더 오르면 안 되고 더 식어도 때리면 안 되고 그걸 다 알거든. 서로 소통이 되는 기예요. 맨 처음에는 공구도 서툴고 내가 몇 개 집게는 가져갔지만 또 자리도 서툴고 그래가지고 불량도 나고 가고 나서 며칠이 지나니까 하나가 완성이 돼서, 기술부장이 나한테 꼭 붙어서 하는 거예요. 가 있는 동안 그 기술부장이 한 개 딱 완성품이 나오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성공했다 이거지, 자기 입맛대로.”


(방짜 심벌즈 소리)
(직원들이 박수 치고 환호하는 소리)
50대 봉주 // 어때요? 소리가 다르지요?
질디언 직원 // 제가 들어본 심벌즈 소리 중에 최곱니다.
한국에 방짜기술이 있었다니 몰랐습니다.
50대 봉주 //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대 22로 오차 없이 섞어서
맨들어야 해요. 지키지 않으면 메질을 견뎌내질 못합니다.
질디언 직원 // 이봉주 선생님 덕분에 제가 맡은 일이 성공했습니다.
아예 저희 회사에 오실 순 없겠습니까?


이봉주 육성 // “법에 걸려가지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에서 그다음에 우리 정부에서는 나는 인간문화재로 지정해버렸죠. 그러니까 이민을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그때는 한국에는 방짜유기 명맥을 유지하는 사람이 저 하나밖에는 없었거든요. 그리고 우리 멤버가 내가 데리고 있던 멤버 다 데리고 가면, 그렇게 되면 납청에서 나온 멤버들이거든요. 진짜 멤버는 여기서 없어, 그다음에는 없어, 내가 데려가게 되면. 그런데 그것도 다 사람의 계획에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운명에 가까운 팔자소관이지, 뭐.”


<사고로 한쪽 눈을 잃다>
#6. 1983년, 안양진유공예사

(유기 공장에서 나는 소리- 메질하는 소리, 놋그릇 소리 등)

제자 // // 선생님이 유기장 보유자가 되시니 찾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50대 봉주 // 신문사나 방송사에서도 오지만,
반상기를 방짜로 만들어달라는 연락이 많이 와.
저는 떻게 생각하네?
제자 // 이젠 유기가 좋은 재료라고 소문이 나서
혼수용품으로 인기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하고 싶으셔야죠.
50대 봉주 // 나야 도전허는 걸 좋아하지.
방짜 전통기법으로는 작은 그릇을 만들긴 어려우니
미국서 알게 된 기계도 써보고, 새 기법을 더해봐야겠어.
제자 // 무엇이든 선생님 밑에서 배울 겁니다.
50대 봉주 // 그럼 오늘은 다른 것도 해볼래?
제자 // 네? 바둑 갖다 놓는 거 말고요?
50대 봉주 // 그래! 오늘은 앞망치 역할도 해보라. 파편 튀지 않게 조심하라!

(망치질 소리)

노년 봉주 // 그때 전, ‘방짜유기는 더 달구거나 더 때리면 구멍이 난다’고,
‘사람 마음도 그러니 욕심 버리라’고 했어야했는데,
그만 깜박했지요. 사고가 난 건 순간이었습네다.

(망치질 소리)
50대 봉주 // (눈에 파편이 튀어서 비명 지르는) 아악! 악!
제자 // (많이 놀라서 울부짖으며) 선생님, 선생님!
거기 누구 병원에 연락 좀 해줘요. 선생님이 눈을 다치셨어요!

이봉주 육성 // “내가 지금도 늘 그러죠. 이게 방짜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내가 살았지, 방짜 공장이 아닌 데서 살았다면 파상풍 있잖아요. 나쁜 균이 들어가서 죽었을 거다. 나는 방짜공장에 무슨 검사하고 실험해서 아는 것은 아니고 방짜에는 균이 없다고 해요. 방짜 공장에서는 ‘땅에 떨어진 떡을 먹어도 균 때문에 안 죽는다.’ 내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생애 가장 잘한 일 두 가지
-88올림픽 400개쌍의 바라 기증+ 1미터60센티짜리 징>
#7. 1988년, 올림픽 위원회 사무실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는 소리)
60대 봉주 // 저 여기가 서울올림픽 위원회 사무실 맞습니까?
직원 // // 어서 오십시오. 이봉주 유기장님.
60대 봉주 // 제 아들하고 같이 왔습네다.
아들 // 안녕하세요? 이형근입니다. 저도 유기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노년 봉주 // 1988년에는 제가 ‘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의
이사장으로 있을 땝니다. 그 자격으로 찾아갔지요.

직원 // 문의 주신 것처럼 이번 서울올림픽 폐회식 때
바라춤이 들어갑니다. 86아시안게임 때 반응이 좋았거든요.
60대 봉주 // (살짝 흥분) 그땐 ‘양은 바라’로 했잖소? 이번엔 진짜로 합시다.
직원 // 그런데 전통 바라는 너무 무겁다고 해서요...
60대 봉주 // (강한 어조로) 우리 전통춤에 양은이라니 말이 됩니까?
무거우면 기술자 보고 무겁지 않게 해줄 수 있냐고 물어봐야 할 것 아니오?
직원 // 그런데... 저희가 예산이 부족합니다.
60대 봉주 // 그러면 공짜로 해주면 하겄습니까?
직원 // 저희야, 저희야 감사하지요.
60대 봉주 // 그럼 공연 후엔 바라 400쌍을
올림픽에 온 외국인들에게 다 나눠주시오.
아들 // 아버님은 한국에 방짜유기가 있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코리아나 / 손에 손잡고)
이봉주 육성 // “내 찬스는 여기다! 이것을 각 나라, 그런 찬스가 없잖아요. 각 나라 선수가 다 모이는데 나눠주면은 자기네 기념관에다 갖다 놓게 되면 한국에 방짜가 있다는 것은 인정이 되잖아요. 목적은 하나 그것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걸로 조건해가지고 400쌍을. 내 평생에 죽기 전에 올림픽이 이런 찬스가 한 번 올 수도 없어. 그러니까 우리 아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밤낮해가지고 그걸 다 맞춰서 납품했어요. 초대장 와서 내가 가서 봤거든. 내가 울었어요. 혼자서 울었다고... 아주 감격해서.”


<납청 방짜유기촌 부활의 꿈을 문경에서 이루다>
#9. 2010년대, 문경 방짜 유기촌

(유기 공장에서 나는 소리- 메질하는 소리, 놋그릇 소리 등)
아내 // 당신, 또 망치를 잡았네요.
노년 봉주 // 여든이 넘고 아흔이 돼도 일할 수 있어서 좋아.
많이 만들지 말고 정교하게 만들라는 당신 말, 지키고 있네.
아내 // 그러게요. 그렇게 잘 만드니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던
청와대 만찬에 당신이 만든 방짜 반상기가 올라갔지요.
노년 봉주 // 전통한식 만들던 당신을 나이 일흔에 만난 것도 천운이고,
누가 봐도 난 행운아가 틀림없소.
한 세기를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문화재 보유자까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인생이오.
산세 빼어난 문경 4만 평 부지에
납청을 닮은 방짜유기촌을 마련하고,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가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

나레이션 // 평생을 이어온 도전은 100년 외길 인생이 되었습니다.
수천 번의 메질을 이겨내고 드러낸 방짜유기의 황금빛,
그 안에는 이봉주 유기장이 견뎌온 고난의 세월이 있습니다.


< 마무리 코너 – 덧붙이는 이야기 >

(징소리)

나레이션 // ‘덧붙이는 이야기’

나레이션 // 이봉주 유기장은 평생 제작해온 유기작품을 대구 방짜유기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박물관에 기증해왔습니다. 2019년에는 방짜유기촌이 자리한 문경 4만 평의 토지와 건물을 천주교재단에 기부해 현재 문경 성요셉치유마을로 조성되었습니다.
이봉주 유기장의 장남 이형근 유기장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형근 // 아버님이 그동안 같이 여기 서울 근교에서 일을 하다가 이제는 시골 내려가서 좀 규모를 축소해가지고 해야 되겠다고 해서 맑은 공기, 고향 갈 거는 포기한 상태니까 고향하고 분위기가 비슷한 데 가서 한번 살아보시고 싶다고 해서 문경시 가은읍이라는 아주 촌으로 내려가서 하셨는데 이상하게 내려가서 하는데 유기 붐이 일어나가지고 갑자기 손님들이 막 오셔가지고서 거기다 뭐 유기라는 유기는 몽땅 다 사가면서 돈을 엄청 많이 버셨어요.
많이 버시면서 버시고 나니까 그걸 아버지나 나나 취미가 일이니까 열심히 하다 보니까 돈을 많이 버셨는데 많이 번 돈을 유기산업에, 유기공방 하는 데다 투자한다고 해서 이제 거기다 방짜유기촌이라고 해서 밑그림을 그리셔서 거기다가 기념관, 전시관, 체험장 해서 한옥으로 굉장히 멋있게 잘 지어놨는데 암만 생각, 그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까 그거를 우리 후손들이 유지 관리하기에는 너무 벅찬 거 같다고 그거를 사회에 번 돈이니까 사회에 환원하는 게 맞지 않냐 해서 그걸 공익재단에 기증하고 따로 그 밑에 농공단지에 부지를 마련해서 거기서 작업장을 만들었거든요. 그거는 활성화하고 나 나름대로 또 열심히 해서 좋은 전수 공간을 새로 만들어야죠.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유기장, 이 봉 주. 마지막 세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극본 김정인, 연출 권윤혜,
출연 하성용, 전해리, 이민규, 이상준, 한만중, 김단, 류지아, 김혜령,
음악 윤아성, 음향효과 이용문, 기술 추신호였습니다.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의 제작비 지원,
국립무형유산원의 자료 지원으로 EBS가 기획, 제작하였습니다.
요약정보

월남하여 갖은 고생 끝에 유기공장을 운영하고, 유기 마을을 만들어 방짜유기의 명맥을 잇는 데 힘써온 유기장명예 보유자 이봉주의 생애를 담은 오디오 다큐드라마.

* 국립무형유산원의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채록사업’에서 확보한 자료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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