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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대중가요의 시대, 신민요와 유성기음반의 등장
글. 이준희(전주대학교 초빙교수)

1939년 8월에 발매된 이화자의 <초가삼간>, <물방아> 가사지
소장·제공: 이준희
신민요는 말 그대로 새로운 민요를 뜻한다. 하지만 그것이 등장하고 정착해서 널리 유행까지 하게 된 과정은 말뜻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형식과 내용이 기존 전래 민요와 여러 모로 다른 신민요에 대한 언급은 192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는데, 근대적 문물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이 처음 그 논의를 주도했다. 재래 문화의 진취적 장점은 살리고 퇴폐적 단점은 버리면서 당대 조선인의 새로운 문화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모색했던 지식인들은, 신민요라는 개념에 주목하면서 1929년 2월에 조선가요협회를 결성해 행동을 구체화했다. 그런데, 앞서 일본에서도 대략 10년쯤 전부터 그러한 움직임이 유사하게 전개된 바 있으므로, 조선 신민요의 시작은 발상과 용어 면에서 일본 지식인들의 신민요 운동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민요의 등장
이광수를 위시(爲始)한 문단과 악단의 명사들이 두루 참여한 조선가요협회에서는 회원들이 새로 만든 노래를 감상회나 지면을 통해 발표했고, 그중 몇몇 작품은 지금껏 전해 오기도 한다. 『안기영 작곡집 제1집』(1929년 11월 간행) 수록곡 <그리운 강남>(김석송 작사)이나 잡지 『학생』 1929년 11월호에 수록된 <젊은 뱃사공 노래>(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 등이 그러한 예인데, 가사와 곡을 만든 김석송과 안기영, 윤극영 등은 모두 조선가요협회 창립 동인이었다. 그리고 두 곡은 이후 1934년에 신민요 곡종으로 표기되어 유성기음반에 수록되기도 했다(<젊은 뱃사공 노래>는 제목과 곡조를 변경). 아마도 일본 유학 때문에 조선가요협회 발족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곡가 홍난파도 귀국한 뒤 1931년 3월에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와 <녹슨 가락지>를 음반으로 발표했고, 신민요 곡종 표기가 음반에 등장하기는 그 두 곡이 처음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지식인 작가들의 신민요 창작이 잠시 활기를 띠긴 했지만, 대중의 호응을 크게 얻는 신민요는 실상 그와 다른 계통인 대중가요에서 등장했다. 나운규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만들어져 1926년 10월에 처음 발표된 <아리랑>이 바로 대중가요 신민요의 폭발력을 처음으로 입증한 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가 <아리랑>은 당시에 신민요로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가사와 곡조 모두 신민요로 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가사는 기존 민요 사설을 토대로 나운규가 직접 썼고, 곡조는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었던 극장 단성사의 악단 악사가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구조 아리랑>을 참고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발표 뒤 3년여가 지난 1930년 2월에 김연실과 채동원(채규엽이 사용한 예명)이 각각 발표한 첫 번째 <아리랑> 음반에는 곡종이 영화소패(小唄)와 유행가로 표기되었는데, 앞서 보았듯 1931년 홍난파 작품 이전에는 음반회사에서 신민요 용어를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1931년 1월에 강석연의 노래로 첫 음반이 발매된 <오동나무> 역시 <아리랑> 못지않게 큰 인기를 누린 신민요 곡이나, 음반에는 유행소곡으로 표기되었다.

왕수복(1917~2003) 사진 엽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통속민요의 전통적 형식을 차용한 창작 대중가요로서 신민요가 명실상부하게 음반 곡종으로도 정착한 때는 1932년으로, 연기와 노래를 겸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이애리수가 8월에 발표한 <에라 좋구나>와 <에헤루야>가 첫 번째였던 것으로 보인다. 배우 겸 가수였던 이애리수, 김연실, 강석연과 서양 성악 전공자였던 채규엽의 노래에는 신민요의 정취를 살리는 전통적 가창의 맛이 아무래도 다소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나, 1933년부터는 전통음악 학습 배경을 갖춘 기생들이 가수로 등장해 본격적인 신민요 유행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 데뷔해 첫 신민요 곡으로 <신방아타령>을 발표한 왕수복은 기생이 대중가요계로 진출하는 데에 성공적인 물꼬를 텄고, 2년 뒤 잡지 『삼천리』에서 주최한 가수 인기투표에서 여성 가수 1위로 선정될 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전성시대를 이끈 가수와 작곡가들
1934년에는 왕수복의 성공에 힘입어 같은 평양 기성권번 출신인 선우일선과 김복희를 비롯해 이은파, 장일타홍, 미스코리아(=모란봉) 등 기생 가수가 연이어 데뷔해 신민요의 장을 크게 넓혔고, 1935년 이후에도 기생이거나 권번 학습 배경이 있는 노벽화, 이화자, 황금심, 조백오 등이 뒤를 이어 등장해 신민요의 전성에 일조했다. 왕수복이 1위로 선정된 『삼천리』 인기투표에서 여성 가수 상위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이 기생 가수였던 점, 나머지 둘 중에서도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 역시 적지 않은 신민요 곡을 불렀다는 점을 보면, 1930년대 중반 신민요의 위상이 대단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러 음반회사에서 경쟁적으로 신민요 가수를 발굴하고 작품을 발표했던 것은 물론, 경성방송국에서도 1934년에 신민요 현상 공모를 진행해 당선작을 보급했고, 언론 역시 신민요 관련 논설을 소개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삼천리』 1936년 2월호에 실린 음반회사 문예부장들의 그해 유행 전망에서도 신민요는 단연 첫손에 꼽히는 화두였다.

1935년 9월에 발매된 이은파의 <앞강물 흘러 흘러> 음반, 이은파의 사진이 실린 오케레코드 음반 봉투
소장·제공: 이준희
많은 신민요 가수들 가운데 선우일선과 이화자는 1930년대 중반과 1930년대 후반에 각각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말 그대로 신민요의 여왕과 같은 존재였다. 서도소리를 기반으로 화사하면서도 보드라운 가창을 선보인 선우일선은 데뷔곡 <꽃을 잡고>부터 큰 히트를 기록했는데, 음반 발매 1년이 안 되어 5만 장이 판매되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1930년대 유성기음반 판매량으로서 5만은 한국 음반 산업의 정점이었던 1990년대의 백만 이상에 비할 수 있는 수치이다. <꽃을 잡고> 외에도 1935년 <태평연>, 1936년 <조선팔경가>와 <능수버들> 등 선우일선의 대표작은 지금까지도 종종 들을 수 있는 신민요의 고전, 나아가 한국 대중가요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우일선이 신민요의 정상에 있었던 1936년에 데뷔한 이화자는 초기엔 그렇게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지 못했으나, 소속 음반회사를 옮기면서 1938년 연말에 발표한 <꼴망태 목동>과 <님전 화풀이>가 크게 히트하며 단번에 선우일 선의 뒤를 잇는, 오히려 능가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돋보이는 표현력으로 개성적인 가창을 구사한 이화자는 경기소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노랫가락>이나 <창부타령> 같은 곡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뚜렷하게 가미해 불렀고, 신민요뿐만 아니라 <어머님전상백>이나 <화류춘몽> 같은 유행가로도 각광을 받았다. 조선악극단의 화형(花形)으로 무대에 서서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이화자의 모습 은 1939년 <思いつき夫人(사려 깊은 부인)>, 1943년 <반도의 처녀들> 등 특별출연 영화에도 기록을 남겼는데, 아쉽게도 두 편 모두 필름이 남아 있지는 않다.

1934년 2월에 발매된 강홍식의 <처녀총각> 음반 딱지
소장·제공: 이준희

1934년 2월에 발매된 박부용의 <노들강변> 음반 딱지
소장·제공: 이준희
여성 가수로는 권번 출신 기생들이 신민요의 인기를 이끌었지만, 남성 가수의 상황은 그와 또 달랐다. 전통음악을 전문적으로 익힌 서도소리 명창 김주호 같은 소리꾼이 신민요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보다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신민요 가수로 우선 꼽을 수 있는 인물은 배우 겸 가수 강홍식과 작곡가 겸 가수 김용환이다. 1934년 2월에 발표된 강홍식의 대표작 <처녀총각>은 다른 음반회사에서 동시에 발표된 박부용의 <노들강변>과 더불어 신민요 붐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후 1935년까지 연이어 발표된 <개나리고개>, <조선타령>, <청춘타령> 등도 기생 가수의 가창과 같은 전통적인 맛은 덜한 대신 전문 가수 못지않게 능란하고 박력 있는 강홍식 노래의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인천까지 찾아가 기생 이화자를 가수로 발탁하고 <꼴망태 목동>을 비롯한 대표작 태반을 작곡해 준 김용환도 강홍식 못지않은 신민요 가수였다. 『삼천리』 인기투표에서 채규엽 다음으로 남성 가수 2위에 선정된 김용환은 극적 표현에 능한 개성적인 고음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1930년대 후반에 직접 작곡까지 해서 발표한 <구십 리 고개>, <정어리타령>, <눈깔 먼 노다지>, <꼴망태 아리랑> 등은 당대 대중은 물론 후대 연구자들에게도 호평을 받는 대표적인 신민요 작품이다.
김용환처럼 직접 노래까지 하지는 않았어도, 1930년대 대중가요 작곡가들 중에는 신민요에서 특히 빛을 발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다만 작품성과 상품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대중가요의 특성상 그런 작가들이 신민요만을 만들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대표적인 신민요 작가로 거론되는 인물은 김교성, 김준영, 문호월, 이면상, 전기현, 형석기 등인데, 모두 서양음악을 상당한 정도로 배웠고 몇몇은 일본 음악학교에 유학한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학습으로 익힌 서양음악에 그저 머무르기만 하지 않았고, 조선 대중의 일상적 음악 향유에 적극 부응해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성공적으로 뒤섞은 신민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정경을 담은 노래가 되었다.

1935년 12월에 발매된 선우일선의 <太平宴(태평연)> 가사지
소장·제공: 이준희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통속민요의 전통적 특징을 대거 수용한 신민요였던 만큼, 그 영향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노들강변>과 <방아타령>, <능수버들>과 <흥타령>, <궁초댕기>와 <신고산타령>, <태평연>과 <창부타령> 등은 신민요와 그 바탕이 된 통속민요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런데 그런 영향 관계의 방향은 경우에 따라 역으로 작용을 하기도 해서, 이제는 <노들강변>이나 <태평연> 같은 신민요가 통속민요처럼 받아들여져 널리 불리기도 한다. 1930년대 신민요의 원천은 대부분 경기소리였지만, 남도나 서도 스타일을 적 용한 곡들도 일부 있었고, 몇몇 작곡가들은 거기에 당대 최첨단의 유행이었던 재즈나 라틴음악까지 과감히 얹기도 했다. <처녀총각>을 만든 김준영이 강홍식의 노래로 발표한 1934년 <군밤타령>이나 <능수버들>을 만든 김교성이 역시 선우일선의 노래로 발표한 1936년 <피리 소리> 등은 광복 이후 1950~6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닐니리 맘보>, <노랫가락 차차차>의 가능성을 이미 보여 준 작품이었다. 신민 요와 스윙 재즈를 결합해 ‘조선 재즈’를 시도했던 작곡가 김해송의 작업은 특히 전위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를 받는데, 가사 없는 연주곡으로 음반에 담기긴 했지만, 1940년에 발표된 <경쾌한 방아타령>은 신민요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숨은 걸작이다.
급변한 대중문화에서 사라져 간 신민요
1930년대 중후반 전후로 대략 10년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신민요는 광복 이후 새로운 환경을 맞아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기생과 권번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었고, 미국 대중문화가 전에 없던 충격으로 밀려들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 여러 신민요 명인들이 이화자처럼 세상을 떠나거나 선우일선처럼 남한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급격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신민요는 대중가요로서 영향력이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닐니리 맘보>나 <노랫가락 차차차>가 한편으로 인기를 누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비판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도, 왕성한 확장 속에 나타난 전향적 혼종이 아니라 급격한 축소 중에 나타난 퇴영적 혼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민요의 여운이 속절없이 희미해져 가기만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남한에서는 대중가요 소수 장르로서 신민요의 의미가 1970년대 초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김세레나 같은 가수가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고, 그 와중에 1930년대 신민요 <온돌 야화>와 <영감타령>이 <갑돌이와 갑순이>, <잘했군 잘했어>로 부활해 인기를 얻었다. 북으로 간 작곡가 이면상의 대표작 <울산 큰애기>는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전래 민요로 위장해 살아남기도 했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신민요의 위상이 훨씬 더 높았고 영향력도 오래 유지되었기에, 남한에서 사라진, 나아가 금기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이면상, 왕수복, 선우일선 등이 북한에서는 계속해서 곡을 만들고 음반을 냈다. 다만, 대중의 자유로운 음악 선택과 소비가 충분히 전제되지 않은 북한에서 그런 신민요가 대중가요로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는 아무래도 의문이 있기는 하다. 광복 이후 남북이 갈리고, 전쟁을 벌이고, 그 신민요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동안, 바다 건너 일본 재일한국인 사회에서도 신민요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의미 있는 궤적을 보인 재일한국인 대중음악에서 신민요는 가장 우선시되는 자원이었다. 모국과 떨어져 불안정한 삶을 살면서도 정체성을 지켜야 했던 재일한국인들에게 그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럽기도 했지만 당위적이기도 했다.
조선가요협회 발족으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는 신민요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대중가요도 철 지난 말처럼 들리는 케이팝(K-POP) 세상에서 신민요는 과연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런 궁리를 하는 동안에도 귓가에 “범 내려오는” 소리가 맴도는 것을 보니, 어쩌면 답을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

1940년 6월에 발매된 <신민요 걸작집> 앨범 표지
소장·제공: 이준희











